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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JA] 한국의 서사, 침략의 무대에서 문화 강국으로
- 게시일2025.10.01.
- 조회수57 Hit
■︎ 미디어: Veja
■︎ 일자: 2025.9.18.
■︎ 기자: Diogo Sponchiato
■︎ 링크: A saga da Coreia: de palco de invasões a potência cultural
■︎ 내용:
<비공식 번역문>
※ 아래 번역문은 이해를 돕기 위한 비공식 요약본으로, 원문(포르투갈어)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상단의 본문 링크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북위 38도선 아래 남쪽에는 K-드라마, K-팝, 첨단 자동차와 휴대전화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나라가 있다. 북쪽에는 국경을 걸어 잠근 공산주의 세습 독재국가가 있어, 핵무기 실험 발표로 이웃과 뉴스의 헤드라인을 뒤흔든다. 남과 북, 두 ‘코리아’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20세기의 갈등과 분단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냉전이 남긴 경계보다 훨씬 오래되고 깊으며, 분열과 화합이 교차해 온 서사로 이어진다.
한국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의 여정을 조망하는 책을, 브라질 역사학자 에밀리아노 운저(Emiliano Unzer)가 최근 출간한 『Filhos do Céu e da Ursa(뜻: 하늘과 곰의 자손 - 한국의 역사)』에서 제시한다. 제목은 한민족의 신화적 기원을 가리키며, 저자는 기원전 수천 년 전 한반도에서 인간의 흔적이 나타난 시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국이 걸어온 길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 궤적을 빚어낸 인물, 왕조, 이념, 종교의 세계를 독자 앞에 펼쳐 보인다.

역사학자 에밀리아노 운저의 저서 『하늘과 곰의 자손 - 한국의 역사』 표지(출처: 제공)
에스피리투 산투 연방대학교의 아시아사 교수가 집필한 이 저서에서 두 가지 특징이 특히 두드러진다. 첫째, 이 영토의 분단은 1950년대 초 전쟁으로 새롭게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한국은 오랜 세월 동안, 때로는 동맹을 맺고 때로는 각축을 벌이던 여러 왕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둘째, 한반도는 빈번히 침략의 표적이 되었는데—처음에는 중국, 이어 일본이었다—이는 국가가 앞으로 취하게 될 윤곽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 도덕적·정치적 가치 속에 융합된 문화적 영향에도 깊이 작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TV 앞에 앉아 한국의 콘텐츠나 드라마를 시청하고, 삼성 휴대전화로 글을 입력하며, 현대자동차를 몰고 브라질 거리를 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한국인이 경제적 기적과 이념적 변화의 과정 속에서 나라의 발전에 피와 땀, 그리고 헌신을 쏟은 결과다. 그 덕분에 한국은 글로벌 지정학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언제나 북쪽의 더 엄격하고 폐쇄적인 ‘형제’와 나란히 존재해 왔다.
‘에밀리아노 운저’ 저자에게 묻다
한국 역사에서 인류사 전체를 대표하거나 특별히 상징적이라 할 만한 순간이나 사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만약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저는 14세기 말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운명이 이념적 갈등에 의해 재편될 수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 왕조가 다른 왕조로 교체된 사건이 아니라, 이후 500년 이상 한국의 정치·사회·문화 질서를 규정한 유교의 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의례와 법전, 그리고 스스로를 도덕의 수호자로 여긴 지식인 관료층에 의해 지탱된 중앙집권적 국가를 낳았습니다. 이는 인류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문명은 단지 군사력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신념과 가치에 의해 지속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전쟁과 종교 역시 한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 주목할 시기는 이른바 삼국시대(1세기~7세기)입니다. 특히 7세기 신라에 의한 통일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복전쟁의 시기가 아니라, 한반도가 문화적 교류와 융합의 실험장이 된 시기였습니다. 중국과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 국가 제도의 정비, 독자적 정체성의 형성이 그러했습니다. 이 과정은 문명이 고립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갈등, 그리고 융합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후 석굴암과 불국사와 같은 불교 유적에 구현된 문화적 번영은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예술과 종교가 정치적 통합과 공동체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책 집필 과정에서, 한국사 속 인물 가운데 가장 인상 깊고 강력하다고 여긴 인물은 누구입니까?
아시아사의 수많은 걸출한 인물 가운데, 제가 특히 매료된 이는 15세기의 발명가이자 기술자·과학자인 장영실입니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일부 기록에 따르면 노예나 천민의 신분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그의 여정은 기술적 성취뿐 아니라 사회적 상승의 상징성에서도 탁월합니다. 출생이 한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던 조선(1392~1897)과 같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장영실은 재능과 독창성으로 인정받아 발탁되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후원자는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은 한국사에서 가장 학구적이고 진보적인 군주 가운데 한 명으로, 과학·기술·문해력의 진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한글 창제 또한 그의 치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미천한 출신을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거의 전례가 없던 방식으로 그에게 관직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장영실이 남긴 업적은 무엇입니까?
왕실에 봉직하며 그는 혁신적인 과학 기구들을 설계하고 제작했습니다.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혼천의와 천구의, 그리고 세계 최초의 표준화된 강우량계 가운데 하나인 측우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인정받은 뒤에도 그는 조정 내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왕을 위해 제작한 수레에 결함이 발생하자 처벌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사회적 편견이 그의 말년을 좌우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는 과학이 개인과 사회를 해방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이 최근 문화 강국으로 부상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 문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복합적인 역사적 과정의 결과입니다. 풍부한 문화적 유산, 외래 문화를 흡수하고 재창조하는 오랜 전통, 전략적 공공정책, 그리고 혁신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국민적 기질이 결합한 덕분입니다. 한국 정부는 일찍이 문화의 경제적·외교적 가치를 인식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국가는 문화산업에 적극 투자했으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과 같은 기관을 통해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이러한 투자는 K-팝뿐 아니라 영화, 비디오게임, 웹툰 산업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BTS의 성공은 한국형 소프트파워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들은 세계 차트를 석권했을 뿐 아니라, 2018년과 2021년에는 유엔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문화는 보편적 감정을 매혹시키는 동시에, 정체성·경제·외교가 교차하는 현대적 소프트파워의 모범적 사례로 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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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남북통일의 가능성은 어떻게 보십니까?
통일은 여전히 상징적 열망으로, 노래·연설·가족의 기억 속에서 되새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두 한국은 이제 거의 평행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북한은 군사화되고 핵무장을 갖춘 체제로 발전한 반면, 남한은 세계화된 번영 사회로 변모했습니다. 70년이 넘는 분단은 이미 서로 자연스럽게 공감하지 못하는 별개의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실질적 통일은 중국·러시아·미국을 포함한 주변 정세의 중대한 변화나, 38선 이북 정권의 심각한 정당성 위기와 같은 요인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구조적 변화라기보다 상징적 접근에 머무를 것입니다. 예컨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여성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아리랑’을 공동의 민속가요로 삼아 출전했던 사례가 그러했습니다.